
우리시대의 몸 삶 죽음
첨단의학과 삶의 문제에 대하여
김진국 지음
- 가격
- 15,000원
- 펴낸 날
- 2010년 10월 8일
- 쪽수
- 328쪽
- 판형
- 152×225mm
- ISBN
- 978-89-964413-1-1 03810
서점에서 만나기
[책 소개]
우리 사회 의료 현실과 사회 문화에 대한 에세이
질병의 시대에 건네는 생명의 목소리
대구경북 인의협(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를 역임했으며 우리 사회 주요이슈들에 대한 에세이들을 발표해왔던 신경과 전문의인 김진국이 지난 10년 동안 발표했던 글을 추려 묶은 에세이집이다.
이 책은 의료계의 주요 쟁점에 대한 논의와, 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몸과 생명에 대한 성찰, 문학에 반영된 인간과 의료계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의료인과 의료현장의 모습이 담겨있는 문학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의 의료 현실을 통찰하고자 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담고 있는 문학작품에서 의료인으로서 저자가 느낀 삶과 죽음의 문제, 의학과 건강의 문제를 돌아본다.
2부는 의료와 건강과 관련된 전문가들의 주장에 대한 비평이나 반론 성격의 글들을 모은 것으로, 우리 사회의 주요 이슈들에 대해 의료 전문가로서 판단하고 책임져야 했던 문제들에 대해 성찰한다.
3부에서는 원폭피해자, 여성, 장애인에 대한 정치사회적인 인식과 의료정책 문제들, 정신과와는 학문적으로 별개인 신경과가 정신과 분야로 오해되고 있는 현실 들을 의료현장에서 직접 느낀 체험들을 통해 이야기한다.
갑갑한 분지의 도시 대구에서,
따스한 아랫목이 아닌 차가운 윗목의 한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저자의 날카로운 사회 비평
저자는 의사라는 직업의 멋들어진 허울에 가려진 의료계의 실상을 고백한다. 실체를 가늠키 어려운 거대 자본 앞에서 의사 개인은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 저자는 “의료에 관한 진정한 소비자 주권 운동은 단순히 환자의 알 권리나 언제라도 진료받을 권리가 보장되는 수준이 아니”며, “의학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버린 건강과 생명에 대한 가치, 몸에 대한 문화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의료 서비스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소비하는 이들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들을 일상 속에서 복구해내고 의료계의 현실에도 새로운 생명의 싹이 트기를 고대하는 저자의 고민과 실천이 절실히 드러나 있다.
[본문 중에서]
지금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공급과잉과 공급의 불균형이 뒤엉킨 채 가닥을 잡을 수 없을 정도의 혼란 속에 빠져있다. 의료 공급의 불균형이 사회문제가 되는 의료소외계층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의료가 몸을 보살피는 기술과 지혜의 차원을 넘어 소비의 대상, 때로는 부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남용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최소한의 질서마저 무너진 의료시장에서 국민들은 약에 찌들어 있다. 어느 한 곳에서도 의지할 곳을 찾지 못했던 고단한 육신을 달래기 위해 무한정 약에 의존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 본문 42쪽
지금 의사들이 해야 할 일은 의권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병동으로 만들어 이익을 챙겨가는 세력들과의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은 국민들의 신뢰와 애정이 뒷받침된 의사의 자존심과 오기뿐이다. ― 본문 65쪽
의약분업시대의 소비자 주권 운동이란 것 또한 별다른 것이 아니다. 의사와 약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된 약과 주사에 대한 문화를 바로잡는 것이고 시민사회의 이런 움직임 없이 의약분업이란 제도만으로 약물의 오남용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 의료에 관한 소비자 주권 운동은 의학기술에 의해 왜곡된 인간과 생명의 가치를 바로잡는 가치전환 작업이어야 한다. 이것은 기술과 자본의 종속에서 스스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의사들을 견인해내는 가장 강력한 힘일 수도 있다. ― 본문 173쪽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모든 개발과 발전의 과정에는 생명의 파괴가 전제되어 있었다. 그 생명에는 우리 인간의 생명도 포함되어 있다. “생명과 안전의 도시”라는 꿈은 개발과 발전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꿈일 것이다. 기술과 도구를 이용하여 이룩한 진보의 역사가 이어져 오면서 인간은 기술에 대해 무한한 환상을 키워왔다. 그 결과 온 지구촌이 지금 엄청나게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기술과 개발,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의 가치에 대한 철저한 성찰 없이 첨단기술로만 건설된 도시를 “생명과 안전의 도시”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 본문 210쪽
몇 해 전부터 의학계의 각 학회는 ‘세포분열’을 거듭하고 있고 이에 따라 수많은 분과학회가 생기고 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세포분열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이것이 무한경쟁에 내몰린 의사들의 경쟁력을 높이고, 의사들 사이의 영토분할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머지않은 장래에 더 큰 문제를 불러올 것이다. 국민들의 일상 문화나 정서와 괴리된 전문성은 1차 의료현장에서는 쉽게 뿌리내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금 1차 의료현장에서 절실히 필요한 것은 고도의 세련된 전문성이 아니라 사람을 전인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1차 의료기관의 포괄적 기능이다. 수많은 인재들이 몰려들고 또 의사들의 높은 교육수준에도 불구하고 의료계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팽배한 이유를 깊이 헤아리지 못한다면 의료계의 앞날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다. ― 본문 319쪽
[저자 소개]
김진국 1960년생. 신경과 전문의. 칼럼니스트
『한겨레신문』, 『영남일보』, 『국제신문』 등 일간지에 칼럼을 연재한 바 있고, 대구MBC, 대구CBS에서 라디오방송 칼럼을 맡기도 하였다. 또 『녹색평론』, 『당대비평』, 『사회비평』, 『말』 등의 지면에 우리 사회 주요이슈들에 대한 에세이들을 적극 발표해왔다. 지금은 대구경북 인터넷신문 『평화뉴스』에 ‘시·서·화가 있는 집 ― 서류당’을 연재하고 있다.
[목차]
책을 내면서
1부 문학과 의학
우리 소설에 그려진 의술의 풍경 ― 한국 의학 100년의 흔적
농담 속에 파묻힌 진실 ― 『아주 오래된 농담』과 의사들
난장이의 죽음, 그 이후 ― 다시 읽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밥과 생명의 위기 ― 삶과 죽음과 시
은빛 마을의 풍경 ― 『슬픈 시간의 기억』과 슬픈 몸
삶이 저물어 가는 모습 ― 우리 시대 죽음의 백서
소와 광우병에 대한 에세이 ― 권력·문화·욕망과 먹거리
2부 의·과학 전문가와 건강
의료대란과 소비자 주권
의료전문가와 건강
생명공학의 실상과 허상
생명과 안전의 도시는 가능한가 ― 2003.2.18. 대구지하철참사, 100일째의 기억
상식과 전문지식의 갈등 ― 수돗물불소화사업의 경우
광우병의 위험과 정부의 무모함
몸과 삶의 위기 ― 인문학이 대안인가
3부 정치·사회·문화와 건강
한국인 원폭피해자 실태와 의료지원 대책
의학기술과 여성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허물기
일상의 언어와 전문용어 사이의 간격
발문 | 질병의 시대에 건네는 생명의 목소리 | 김연주
[표4 (뒤표지)]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의료계가 의약분업을 빌미로 파업을 하던 그 무렵을 전후해서 최근까지 공론의 장에서 논의되던 ‘의료’와 ‘건강’과 관련해서 쓴 글들, 의료인이 아닌 제3자의 시각에서 본 의사와 의료현장에 대한 이야기들을 내 나름의 시각에서 정리하여 묶은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에 대한 최근 논란에서부터 1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생명복제와 관련된 글도 함께 실려 있다. 이렇게 오래 묵혀 둔 글까지 꺼내 한 책에 묶어 놓은 것은 우리 사회에서 이런 쟁점들이 우선 순위에서 밀려나 있을 뿐 여전히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하나같이 해결되지 않은 의제들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잊고 무시해도 될 만한 의제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 사회는 매일 새로운 의제들이 만들어져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이 한 곳에 오래 고정되기 힘든 곳이기도 하다. 그것이 역동적인 사회의 공통적인 특성인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 사회에서 해결되지 않는 의제들이 쉽게 묻혀버리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우리 사회의 지적 풍토의 가벼움 탓이 아닐까 한다. 체세포 복제를 둘러싼 생명윤리적 쟁점들은 우리 사회에서 벌써 유행 지난 노래가 되고 말았지만 해결이 되었다거나, 사회적 합의를 이룬 지점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는 지식인이나 언론인은 구경하기 어렵다.
― ‘책을 내면서’ 중에서
첨부)
[발문]
질병의 시대에 건네는 생명의 목소리
김연주 (작가)
2010년 8월, 대구시는 첨단의료복합단지 선정 일 년째를 맞이하였다. ‘의료산업 실리콘밸리’ 구축을 목표로 현재 103만 제곱미터 규모의 대지 조성공사가 진행 중이며, 올 하반기부터 민간 입주구역 부지를 분양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인재와 기업 유치를 위해 글로벌펀드와 메디시티 기금을 조성할 계획이란다. 대구시는 ‘메디시티 대구’의 브랜드화, 밀양신공항 유치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의료시장 개방 이후, 지자체마다 의료산업 육성에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지만, 서민들의 건강이 이전보다 나아지리라는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대구시는 법정전염병인 결핵 증가율이 27.7%로 전국 1위다. 최근 수년 간 한국에서 결핵 발병률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으며, 매년 2,300여 명이 결핵으로 사망했다. 얼마 전 대구의 모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결핵 집단발병 사태는, 신종플루대유행에 이어 또다시 전염성 질환 확산에 대한 공포감을 불러왔다.
정부와 지자체는 의료산업 부흥을 외치기 전에 ‘OECD 국가 중 결핵사망률 1위’라는 불명예를 극복할 수 있는 정책부터 당장 시행하여야 할 것이다. 서민들의 건강권은 제쳐둔 채 거대 기업의 의료시장 진출과 고객 유치에만 매달린다면, 그 폐해는 국가의 지원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의료취약 계층에게 전가될 것이 분명하다. 면역력을 키울 짬이 없는 학생들, 노숙자, 이주노동자, 노인들에게 ‘메디시티 대구’는 달아오른 분지에 떠오른 신기루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시대의 몸·삶·죽음』의 저자 김진국 선생은 196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줄곧 대구에서 성장하였고, 신경과 전문의가 된 이후 각종 의료 현안을 주제로 꾸준히 글쓰기를 이어왔다. 그리고 2010년 가을, 대구에서 갓 태어난 출판사 〈한티재〉에서 선생의 글 열여덟 편을 엮어 책으로 발간하였다.
이 책은 의료계의 주요 쟁점에 대한 논의와, 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인간의 몸과 생명에 대한 성찰, 문학에 반영된 인간과 의료계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책을 읽는 경험은 간단없이 뒤틀린 내장 속 같은 현실의 굽이굽이를 펜라이트를 비춰가며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고독하고 지난한 여행을 연상시킨다. 그 여행에서 우리는 언젠가 한번은 만났을, 아니 날마다 마주치지만 얼굴을 떠올릴 수 없는 ‘난장이’들의 생애와 마주하게 된다. ‘난장이’들을 생산해내는 거대한 시스템을 어둠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병원은 사람을 일상의 삶과 그가 소속된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공간이며 인간관계의 단절을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원래 병원은 일상의 삶에서 격리될 수밖에 없는 가난한 병자와 연고자가 없는 부랑자를 위한 수용시설로서 기능을 했다.
― 「우리 소설에 그려진 의술의 풍경」 25쪽
영국의 지리학자인 에드워드 렐프는 그의 저서 『장소와 장소상실』에서 무장소성(無場所性)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것은 뿌리를 잘라내고, 상징을 침식하고, 다양성을 획일성으로, 경험적 질서를 개념적 질서로 바꾸어버리면서, 가장 심각한 수준에 도달한다.” 무장소성은 ‘의미 있는 장소를 가지지 못한 환경과 장소가 가진 의미를 인정하지 않는 잠재적인 태도’로 정의된다. 이러한 무장소성은 ‘기술’과 ‘집권적 권력’에 의해 계속해서 확장되어 왔다.
격리되어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공간. 역할에 따라 위계가 나눠지고 그 대우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것이 당연시되는 공간.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밀실 속의 권력’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공간. 용도에 부합하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공간. 병원은 각개 집단의 집합체는 될지언정 결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없는 ‘불모의 공간’이 되어간다. 효율과 수익성에 맞춰 구조화된 그곳에서 ‘격리’를 거부하며, 자기가 누구인가를 말하려는 이들은 가차 없이 추방당한다.
대구의 모 대학병원 식당의 해고노동자들. 그들은 환자식당 외주철회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옥외 천막농성장에서 오늘도 79일째 철야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병원 식당 정규직 노동자에서 외주업체의 계약직 노동자로 옮겨갔던 그들에게, 사측은 올해 6월부터 재하청업체의 노동자로 재입사하라고 요구했고, 노동자들은 이를 거부했다. ‘인력관리 효율’과 ‘서비스 질 향상’을 내세우는 병원 자본에 의해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농성장 천막 아래서 폭염의 여름을 지나왔다. 이미 밀려나올 대로 밀려난 이들을 여기서 어디로 추방하려는 것인가.
수십 년에 걸쳐 병원 환자들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낸 노동자의 몸. 그 몸은 참으로 ‘고마운 몸, 고운 몸’이다. 식당 노동자들은 밥을 짓는 일로 쌀을 사고 그의 자녀들을 길러내었을 것이다. 고된 노동의 흔적을 몸 속에 갖가지 질병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 몸은 아름답지 않은가. 아름다움은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이 시대가 ‘아름답다’고 노래하는 몸들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약과 기술은 엄청난 효과를 나타냈다. 난장이의 키가 커지고, 누런 피부는 뽀얗게, 하얀 피부는 뽀송뽀송하게, 평면적인 얼굴에 낮은 코는 갸름한 얼굴에 오뚝한 콧날로, 튀어나온 광대뼈는 깎아내서 반듯하게, 짧은 하반신은 쭉쭉빵빵하게, 납작한 가슴은 불룩하게, 굵은 몸통은 잘록하게 다듬어낸다.
― 「난장이의 죽음, 그 이후」 82~83쪽
멋진 몸을 욕망하는 개인이 성형외과를 찾는 것이 이젠 더 이상 별스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성형외과가 포화상태에 이르러 성형외과 의사들의 밥벌이가 어려워졌다는 뉴스가 나온 지도 벌써 몇 년 전이다. 이참에 한국관광공사가 의료관광 활성화를 위해 이색적인 활동을 펼쳐보였다. 중국의 최대 미용성형병원인 ‘화메이병원’ 의료진을 초청, 한국의 유명 가슴성형센터에 견학을 주선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몽골의 여성 톱 모델을 ‘의료관광 서포터즈’로 위촉하면서 강남의 모 성형외과를 통해 눈, 코, 사각턱, 광대뼈, 앞턱 수술과 귀족수술 등 대대적인 성형수술을 지원했다. 한국관광공사가 의료시장의 포주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냐고 탄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의료관광의 최대 수혜자는 실력 좋은 의료진과 최신기술을 갖춘 병원 자본이 될 것이 자명하다.
의약분업의 필요성이 제기될 때마다 의사들은 약가 마진에서 음성 수입을 얻는 부도덕한 집단으로 매도당했다. 그런데 불합리하게 책정된 약가 때문에 최대의 이익을 얻은 집단은 의사들이 아니라 제약자본이었다. 의사들이 제약자본의 방패막이였던 셈이다. 첨단시설, 최신장비, 최신기술이 의료기관 사이에 최고의 경쟁력이 되어 있고 여기에 소비자들이 환상을 가지고 있는 한, 의료비의 낭비구조는 결코 개선되지 않을 뿐더러, 그에 따른 반사이익은 의료 자본이 가져가고 의사들은 더욱 궁핍해진다.
― 「의료대란과 소비자 주권」 169쪽
저자는 의사라는 직업의 멋들어진 허울에 가려진 의료계의 실상을 고백한다. 실체를 가늠키 어려운 거대 자본 앞에서 의사 개인은 무력한 존재일 뿐이다.(“의학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병원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병원 자본의 힘은 더욱 커져갔고 의사는 병원 경영진의 뜻을 따라가야 하는 고임금 노동자의 처지로 내몰렸다.”) 승자독식의 논리는 의료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의료자본이 성장할수록 정부는 자본의 이익 창출에 부합하는 새로운 제도들을 만들어낸다. 공공의료의 근간을 흔드는 영리병원 도입이나 민영의료보험법안 발의 등 의료민영화의 수순을 정부가 진행하고 있다. 바야흐로 민영화가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이 의료민영화에 지지를 보내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공공노조가 지난 5~6월, 전국 7개 병원의 환자와 보호자 57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9.4%가 영리병원 도입으로 가계의료비가 증가할 것이라 예상했다. 진료실적에 따른 차등성과급 도입에 대해서도 응답자의 80% 이상이 “불필요한 검사가 많아지고 돈벌이 환자를 선호하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한쪽에서는 더 좋은 의료서비스에 대한 욕구가 팽배해지는 한편, 서민들은 의료민영화로 인해 의료비 부담이 가중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고가의 의료서비스를 구매할 수도 없으며, 건강을 위해 일정한 시간과 경비를 투자할 수도 없는 이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저자는 “의료에 관한 진정한 소비자 주권 운동은 단순히 환자의 알 권리나 언제라도 진료받을 권리가 보장되는 수준이 아니”며, “의학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버린 건강과 생명에 대한 가치, 몸에 대한 문화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의료 서비스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을 소비하는 이들도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체장애인의 방화로 발생한 대구지하철참사 이후 “지하철의 안전 시스템 구축과 완벽한 복구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가 지역사회의 소외계층들을 사회의 구성원으로 통합할 수 있는 지역단위의 정책을 만드는 것”이라는 저자의 지적은 참으로 적절하다.
거대한 병동 속에서는 아무도 살고 싶어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잃어버린 가치들을 일상 속에서부터 복구해내어야 한다. 마을과 텃밭, 골목길과 광장에서 누구나 쉽게 만나고, 어울리고, 이야기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격리와 소외를 넘어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 깊은 사귐이 이루어지는 공간, 그곳에서 가장 근원적인 치유가 이뤄질 것이다.
지금 의사들이 해야 할 일은 의권을 쟁취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병동으로 만들어 이익을 챙겨가는 세력들과의 싸움이다.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은 국민들의 신뢰와 애정이 뒷받침된 의사의 자존심과 오기뿐이다.
― 「농담 속에 파묻힌 진실」 65쪽
책을 읽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개의 단어, 그것은 바로 ‘자존심’과 ‘오기’였다. 지하 벙커에 숨은 권력, 끊어지는 물길과 사라지는 습지들, 너무도 많은 자동차와 어두운 뉴스들, 기후 이상으로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는 재난 소식들……. 그저 새가슴으로 살아갈 뿐인 작은 사람들에게 밀려드는 파괴의 굉음과 비명소리는 고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싸워야 한다고, ‘자존심’과 ‘오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 갑갑한 분지의 도시에서, 따스한 아랫목이 아닌 차가운 윗목의 한 자리를 꿋꿋이 지켜주고 계신다. 발문을 쓸 자격도, 깜냥도 되지 않는 이에게 지면을 내어주신 저자와 〈한티재〉 출판사에 감사드린다.
